느리게 읽기

빨리 읽지 않고, 오래 기억하는 법 : 느린 독서의 기술

slowie 2025. 4. 17. 20:21

자연 속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그린 일러스트다. 연두색 배경의 숲속에서 한 사람이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고 있다. 머리를 작은 가방이나 책에 기대고 편안하게 몸을 뉘어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책을 즐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바람을 표현하는 선들이 그려져 있어 평온한 자연 속 독서의 즐거움을 나타낸다.

 

 

독서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이 있으실 거예요. 멋진 책을 읽었다고 자신있게 말했는데, 막상 그 내용을 설명하려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상황 말이에요. 저도 그랬어요. 한 달에 10권씩 읽었다고 자랑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진정한 독서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 글에서는 책을 빨리 읽는 것보다 오래 기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1. 속독보다 중요한 건 기억에 남는 독서예요

 

요즘 독서 문화를 보면 책방 인증샷, 필사 노트, SNS에 공유하는 명언들로 가득하죠.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읽는 흔적만 남기고 정작 내용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면, 그건 진정한 독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많은 책을 빨리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하지만 모든 책에 같은 방법을 적용할 필요는 없어요. 특히 나에게 중요한 통찰을 주는 책이라면, 조금 더 천천히 읽는 편이 좋을 수 있어요. 제가 책과의 관계를 다시 찾아가면서 발견한 방법들을 소개해드릴게요.


2. 책을 펼치기 전에 잠시 멈춰보세요

 

저는 요즘 책을 읽기 전에 항상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요. 이 책을 왜 읽으려고 하는 걸까? 이 책에서 내가 얻고 싶은 게 뭘까? 이런 질문이 없다면, 그저 또 하나의 읽은 책 목록에 추가하는 수준에 그칠 수 있어요.

 

책을 펼치기 전에 이런 질문을 던져보세요.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무엇을 알게 될까? 이 책이 내 삶의 어떤 부분에 도움이 될까? 이런 질문들은 마치 여행을 떠날 때 지도를 보는 것과 같아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주죠.

 

예를 들어, 철학책을 읽을 때면 이 사상가의 생각 중에서 내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며 시작해요. 이렇게 하면 그냥 정보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부분을 더 깊이 읽게 돼요.

 

목차를 먼저 살펴보고 관심 있는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여두는 것도 도움이 돼요. 모든 책의 모든 부분을 똑같이 읽을 필요는 없어요. 나에게 지금 필요한 부분에 집중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죠. 이건 불완전한 독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목적의식이 분명한 능동적인 독서의 시작이에요.

 

젊은 여성이 앉아서 노란색 책을 읽고 있는 일러스트다. 파란색과 흰색 셔츠를 입은 여성이 다리를 꼬고 앉아 집중하고 있다. 주변에는 독서등, 책들, 식물, 시계 등 독서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파란색 계열의 차분한 색조로 평화로운 독서 시간을 표현하고 있다.


3. 책과 대화하듯 메모를 남겨보세요

 

많은 분들이 책을 읽으면서 중요한 부분에 형광펜을 긋거나 밑줄을 그어요.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표시들을 나중에 다시 보지 않거나, 봐도 왜 표시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엔 줄 긋기보다 짧은 메모를 남겨요. 문장 옆 여백에 5~10자 정도의 짧은 코멘트를 적는 거예요. 내 상황과 비슷, 이건 의문, 시도해볼 것, 생각이 다름 같은 식으로요.

 

이렇게 하면 책 읽기가 그냥 정보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저자와 대화하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동의하는 부분, 의문이 드는 부분, 적용하고 싶은 부분을 구분하면서 읽으니까 자연히 내용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아요.

 

전자책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요즘은 대부분 앱에서 메모 기능을 쓸 수 있어요. 오히려 종이책보다 정리하고 찾기가 더 쉬운 장점도 있죠. 다만 전자책에서는 너무 많은 부분을 표시하기보다, 정말 중요한 부분에만 메모를 남기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가끔은 책의 내용에 전혀 동의할 수 없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땐 더 적극적으로 메모를 남겨요. 이 부분은 내 경험과 달라요 또는 이 주장의 근거가 약한 것 같아요 같은 비판적인 메모도 능동적 독서의 증거예요. 동의하든 반대하든, 내 생각을 써보는 순간 그 내용은 이미 내 것이 되기 시작해요.

 

조용한 독서 환경을 보여주는 일러스트다. 파란 셔츠를 입은 안경 쓴 남성이 독서등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다. 옆에는 책 더미와 식물이 있고, 작은 간식도 보인다. 배경에는 톱니바퀴 모양과 말풍선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어 독서를 통한 사고와 상상의 세계를 암시한다.


4. 책을 읽고 나서 내 말로 정리해보세요

 

독서의 완성은 책을 다 읽은 후에 이루어져요. 책을 읽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그 내용의 대부분은 며칠 안에 잊어버리게 돼요. 심리학에서는 이걸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이라고 불러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책을 읽고 나서 누군가에게 설명하듯 3줄 요약을 해보는 거예요. 친구에게 요즘 읽는 책이 있는데라고 시작하는 가벼운 대화가 아니라, 정말로 핵심을 간추려 표현해보는 연습이에요. 이때 중요한 건 저자의 표현이 아닌 내 말로 풀어내는 거예요.

 

예를 들어 심리학 책을 읽었다면, 이 책은 인간의 선택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보여주면서, 그런 편향을 알아차리고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방법을 알려줘요라고 요약할 수 있어요. 이렇게 내 말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뇌가 다시 한번 정보를 재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기억이 더 강해져요.

 

블로그나 독서 일기에 짧게라도 감상을 적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여기서 중요한 건 완벽한 서평이 아니라, 내가 책에서 배운 것, 느낀 것, 적용할 수 있는 것을 솔직히 표현하는 거예요. 때로는 책 속 한 문장이 주는 영감만으로도 충분해요. 그 한 문장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풀어쓰는 것만으로도 독서는 이미 내 삶에 스며들기 시작해요.

 

두 사람이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 일러스트다. 한 명은 흰 머리에 안경을 쓴 연세가 있어 보이는 분으로 청록색 책을 들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모자를 쓴 채 베개에 기대어 누워서 책을 읽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독서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따뜻한 분위기로 표현되어 있다.


5. 느린 독서의 철학을 배우고 싶다면

 

이런 느린 독서의 철학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야마무라 오사무의 <천천히 읽기를 권함> 이라는 책을 추천해요.

 

야마무라 오사무는 이 책에서 현대 사회의 속독(續讀)과 남독(濫讀) 문화를 비판하며, 책을 빨리 읽는 것은 책이 가져다주는 모든 행복을 포기하는 일이라고 강조해요. 저자는 특히 다치바나 다카시와 후쿠다 가즈야 등이 주장하는 책읽기 방식을 비판하면서, 책을 읽는 방식이 곧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관점을 일관되게 제시해요.

 

이 책에는 저자가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경험한 황홀한 순간들이 아름답게 담겨 있어요. 예를 들어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에 나오는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라는 구절을 세 번째 읽었을 때 비로소 그 참맛을 느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저자는 이전에 이 구절을 놓친 이유를 빨리 읽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요.

 

야마무라는 신문, 잡문 또는 그 밖의 책을 남독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 사람의 눈동자는 흐트러져 있다 라고 말하며, 책을 천천히 읽는 것이 삶의 방식의 전환이며 살아가는 리듬의 전환이라고 주장해요.

 

이 책은 단순한 독서법 안내서가 아니라, 몸의 리듬, 마음의 속도에 맞춘 책읽기를 통해 삶을 더 풍요롭게 즐기는 방법을 알려주는 철학서예요.

 

길을 걷는 이유가 그저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함뿐이라면 그 길이 얼마나 외롭고 괴로울까요? 풀과 돌멩이와 바람과 먼 산의 능선과 새소리까지도 함께 걷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면 그 길이 넉넉하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책읽기도 마찬가지예요. 천천히 읽으며 책이 주는 모든 즐거움을 누려보는 건 어떨까요?

 

 

천천히 읽기를 권함 : 알라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책을 천천히 읽자라는 지은이의 주장을 담고 있다. 책읽기도 일이 되어버린 세상, 천천히 읽기야말로 삶의 방식의 전환이며 살아가는 리듬의 전환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주

www.aladin.co.kr


6. 나만의 독서 리듬을 찾아보세요

 

느리게 읽는다는 건 단순히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를 늦추는 게 아니에요. 그건 책과 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일이죠. 책을 그냥 통과하는 게 아니라, 책과 함께 생각하고, 대화하고, 성장하는 방식을 찾는 거예요.

 

모든 책을 이런 방식으로 읽을 필요는 없어요. 가벼운 소설, 참고서, 시사 잡지 등은 각자의 목적에 맞게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읽어도 좋아요. 중요한 건 이 책을 왜 읽는가라는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고, 그에 맞는 독서법을 선택하는 일이에요.

 

결국 오래 기억에 남는 독서를 위해서는, 먼저 나와 책 사이의 호흡부터 찾아야 해요. 느린 독서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깊이 있는 사고와 지속 가능한 배움을 위한 하나의 태도, 하나의 철학이에요. 빠른 세상에서 조금 더 천천히, 하지만 훨씬 더 깊게 읽는 방법을 한번 시도해보시는 건 어떨까요?